엔드뷰
1. 금천 강씨의 최고 스타 구국의 영웅 ‘강감찬’
오랜만에 대하사극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KBS 대하사극 ‘고려 거란 전쟁’이 방영 중입니다. 여기서 작가는 강감찬의 빈 기록을 상상력과 당시 정황을 활용하여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극에서 강감찬은 거란 황제를 기만하고, 개경을 점령한 뒤, 교란작전으로 현종의 죽음을 퍼트리려는 작전을 결정적인 순간에 막습니다.
하지만 정작, 강감찬을 기록한 고려사에는 그런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강감찬이 처음 벼슬에 나간 것은 고려 성종 때이지만, 실제 기록은 개경함락 직전에 강력하게 몽진을 주장했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역사는 이후 현종이 다시 몽진에서 개경으로 환도할 때까지 강감찬의 행적에 대해선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정사의 기록으로 강감찬은 갑자기 튀어나와 거란과의 최후 일전을 준비했고, 거란의 3차 침략에 맞서 귀주에서 거란 10만 정예병을 처참하게 몰살시킨 영웅적인 전공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강감찬의 생애는 구체적으로 어떠했을까요? 무엇보다 강감찬은 한미한 가문이 아니라 왕건을 도와 통일전쟁을 도운 삼한벽상공신 강궁진의 아들이란 점입니다. 공신의 자녀가 성종 때 처음 벼슬을 시작하고 현종 때 몽진을 주장했던 예부시랑의 직책이 역사서에 나오기 전까지 역사적 흔적이 사실상 없습니다. 아니, 이순신 장군도 꾀 많은 기록이 남겨져 있음에도 강감찬은 그의 생애가 상세히 역사적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강감찬의 빈약한 역사는 많은 설화와 전설이 빈자리를 메꾸고 있습니다.
강감찬이 태어난 곳은 고려 당시 금주 낙성대입니다. 금주는 지금의 “영등포구, 구로구 동부, 금천구, 동작구 남서부, 관악구, 광명시, 안양시 만안구 일부”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지역을 말합니다. 고려 때는 금주라고 불렀으며, 조선은 제후국의 법도에 따라 ‘주’를 ‘천’으로 고치면서 태종 때, 금천으로 불렸습니다. 금천의 중심은 지금의 금천구로서 옛 시흥의 중심지기도 했습니다. 금천은 정조 때, 시흥으로 개칭되었으니, 시흥과 관련된 지명은 곧 금천과 연관된 지역이라 말해도 틀리지 않겠죠?
탄생부터 강감찬은 전설적인 설화가 전해 옵니다. 감강찬의 아버지 강군진이 태몽을 꾸고, 훌륭한 아들을 낳고자 할 때, 귀가 중 여인으로 둔갑한 여우를 만나 관계를 맺어 강감찬을 낳았다고 합니다. 또 다른 버전은 강감찬이 태어날 때, 문곡성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설화가 가장 유명한 버전입니다. 문곡성은 북두칠성의 4번째 별로, 옛날부터 문과 재물을 관장한 별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이 설화에서 문곡성인 강감찬이 태어난 곳이란 것에서 유래한 ‘낙성대’가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강감찬이 처음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성종 2년(983) 이후, 1009년 예부시랑이 될 때까지 행적이 기록되지 않습니다. 더욱이 현종 1년(1010년) 강조의 정변 이후, 2차 요여 전쟁이 발발 할 당시, 홍화진, 서경 전투에서 분전했음에도 요 성종의 20만 대군이 갑자기 개경으로 진격할 때, 강감찬은 몽진을 현종에게 주청한 이후로 또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고려를 구한 구국의 성웅이라 불리는 위상에 비하면 정사의 기록이 많지 않다 보니, 현재 방영 중인 ‘고려거란전쟁’에선 그 공백을 작가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결정적인 순간에 강감찬이 활약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은 오히려 대중에겐 그 빈 공백을 전설과 설화로 채워 넣을 좋은 소재가 됩니다. 강감찬은 소년 시절, 자기 얼굴이 곱상하게 마음이 들지 않아 스스로 천연두를 얽게 해서 곰보가 되었다는 설화가 있다고 합니다. 강원도 평창군에도 강감찬의 설화가 숨겨져 있습니다. 평창읍과 대화면 사이 건천에서 강감찬이 목이 말라 시내 물을 떠달라고 동네 주민들에게 부탁했는데 이를 주민들이 거절하자 화가 난 강감찬이 부적을 더 내려보내 물을 마르게 했다는 전설이 전해 옵니다. 장인어른을 골탕 먹인 일화도 있는데 강감찬이 처가에 갈 때마다 장인에게 매번 큰절을 올리는 게 귀찮게 생각하자, 어느 날 강감찬은 장인의 바로 앞까지 가서 장인의 코에 닿을 만큼 머리를 숙여 절을 올렸습니다. 이에 장인이 내 콧등이 떨어지는 줄 알았으니, 다음엔 멀리 떨어져 절을 올리라고 말했고, 강감찬은 이후 절을 올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밖에도 강감찬이 여러 지역에서 개구리가 시끄럽게 울자, 부적을 쓰거나 도술을 썼다는 둥 여러 버전으로 개구리를 퇴치했다는 설화가 있습니다.
이런 전설도 전해 옵니다. 강감찬이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머리가 좋아 작은 고을의 원님이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아전과 향리들은 새로 온 원님이 나이도 젊은 걸 보고 비웃자 이에 강감찬은 이들을 불러 모아 동헌 뜰의 수수를 가리키며 ‘저기 수숫대를 모두 그대들 소매에 넣어 보라’고 명령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당연히 수숫대가 사람 소매에 들어갈 리가 없자 강감찬이 겨우 1년 자란 수숫대도 소매 속에 넣지 못하면서 감히 20년도 넘게 자란 나를 소매 안에 넣고 흔들려 했다고 일갈했다는 전설도 전해 옵니다. 이 전설은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려 시대, 아전과 향리는 조선과 달리 후삼국 때부터 지역에서 사실상 왕처럼 군림했던 서양 중세의 영주와 같았습니다. 그런 아전과 향리에게 젊은 강감찬이 기지로 제압했다는 점은 강감찬의 뛰어난 점과 동시에 아직 지방의 권력이 미치지 않던 고려 초기에 강감찬이 얼마나 민생에 관심을 가졌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일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강감찬의 설화는 정사에 기록되진 않았으나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중요한 자료입니다. 강감찬은 여러 설화에서 민생의 어려움을 해결하거나 정의를 실현하고, 당시 지방에서 왕처럼 군림하면서 가렴주구로 백성을 압제하던 호족의 전횡을 바로잡으려 노력했던 삶을 살았음을 알려 줍니다. 동시에 그의 신념은 당시 개국공신의 자손으로 충분히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음에도 한동안 한직과 지방관직을 전전하면서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관직을 시작한 이후로 올곧은 성정으로 상관의 모함을 받아 여러 번 좌천을 받은 이순신의 일대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한 인물에 대한 설화는 후대에 더 윤색된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당시 고려인에게 있어 강감찬이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나라를 구한 영웅이지만 그저 중앙관리로만 있었다면 이렇게 여러 지역에서 백성들을 돕는 목민관으로까지 추앙을 받진 않았을 겁니다. 강감찬의 강직함에는 백성을 위한 진정한 정치를 마음에 품었기 때문에 3차, 여요 전쟁에서 끝끝내 고려를 괴롭히던 거란을 격퇴하고 승리로 이끌 수 있었습니다. 강감찬은 금천에서 낳은 고려 최고의 영웅이자 백성을 사랑했던 목민관으로 영원히 사람들의 기억에 오래 남을 것입니다.
2. 강감찬의 후손으로 같은 상황에서 비극적인 결말을 맺은 민회빈 강씨
강감찬이 2차여요 전쟁부터 3차 전쟁에 귀주대첩으로 고려의 영웅으로 자리매김한 뒤로 금천 강씨는 번영을 누렸습니다. 금천 강씨는 조선시대에도 관직에 나갔으며 광해군 3년인 1611년 우의정을 지낸 강석기의 5남 3녀 중 차녀로 태어난 민회빈강씨가 있습니다. 아버지인 강석기는 당시 서인 출신으로 인조의 핵심지지 세력에 속했으나 온건한 행보를 보였습니다. 강석기가 광해군 10년에 조정에 인목왕후의 폐비론이 일어나자 사직하고 금천에 내려와 칩거하면서 강 빈도 가족들과 함께 금천으로 낙향했습니다. 이는 광해군과 대척 관계인 인조에 마음에 들었으며 인조반정 이후, 재기용 되었습니다. 그리고 4년 뒤, 당시 세자인 소현세자와 혼인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강 빈이 소현세자의 세자빈이 되기 전 강석기는 소현세자를 가르치는 왕세자 경연의 시강원 당직 스승을 맡기도 했으며 이런 연이 후일 세자와 자신의 차녀와의 혼인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이렇게 행복만 가득했을 거 같은 세자빈 강씨는 역사의 거대한 소용돌이인 병자호란의 한복판에 휘말립니다. 병자호란은 어쩌면 민회빈강씨의 선조인 고려 강감찬이 겪었던 여요 전쟁과 유사했습니다. 당시 조선을 둘러싼 판세는 급변했습니다. 임진왜란 와중에 힘을 키운 여진은 누르하치를 중심으로 마침내 후금을 세웠습니다. 선조에 이어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중립 외교를 통해 명청 교체기에서 조선의 안정을 취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인조는 반정 후, 광해군의 중립 외교를 폐기하고, 명에 충성을 다하는 외교 노선으로 회귀합니다. 이에 조선이 후금과 적대적인 관계로 전환하자, 후금은 명을 공격하기 전 먼저 조선을 침략하고 명과의 관계를 끊을 것을 요구합니다. 이에 조선 조정과 후금 사이에 화의 조약을 맺고 철군한 것이 바로 정묘호란입니다. 이때 조선이 방비를 해서 강감찬이 귀주대첩을 벌인 것처럼 후금을 막아냈다면 다행이었으나 불행히도 인조는 아무런 방비를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내몽골을 점령하고 국력이 강화된 후금은 청으로 국호를 바꾸고 칭제건원론에 조선이 따를 것을 요구했으나 인조가 거부하자 결국 병자호란으로 청 태종에게 삼전도에서 인조가 3천 배 절을 했던 치욕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격변에서 민회빈강씨의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강 빈은 청나라군을 피해서 원손을 보호하고 왕실 가족을 통솔했으며 나중에 청의 포로가 된 이후 적장 용골대가 포로로 잡힌 왕실 식구 중 가장 신분 높은 세자빈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희롱까지 받는 치욕을 겪어야 했습니다. 청은 강 빈과 소현세자, 봉림대군을 볼모로 끌려갔습니다. 이때 볼모로 청에 끌려가는 길은 비참했는데 조선의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는 비참한 상황을 직접 목격해야 했습니다. 설상가상 강 빈은 심양에 도착하자마자 3녀인 경숙군주를 출생했으며 그동안의 피로로 먼저 누워야 했습니다. 당시 강 빈은 볼모 생활에서 청으로부터 어떤 도움을 받지 못하고 단지 20만 평의 땅만 받은 상황에서 심양 시내에서 노예시장에 끌려온 조선인을, 소현세자를 설득하여 이들을 구하고 소현세자가 받은 땅에서 농사하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러면서 강 빈은 농장을 운영하고 소현세자는 청나라 고관들과 교류하며 나름 외교활동을 했으나 이런 경력이 결국 후일 인조의 미움을 사게 됩니다.
청은 다시 소현세자와 인질로 잡은 조선 왕족을 귀환시켰지만 인조는 소현세자를 절대로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소현세자는 석연치 않은 사인으로 갑자기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소현세자가 사망한 이후 소용 조씨를 저주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인조는 이를 강 빈을 제거하는 사건으로 조작하여 결국 강 빈의 궁녀들을 혹독하게 고문 조사했습니다. 또한 인조 24년에 수라상에 올린 전복에서 독이 발견되지만, 인조는 의금부가 아닌 내시를 통해 강 빈의 궁녀만 집중적으로 수사하여 결국 36살 강 빈은 시아버지 인조에 의해 조씨 저주 사건과 인조 독살 음모를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궁에서 쫓겨난 뒤 사사 되었습니다. 또한 강 빈의 세 아들들까지 전부 제주도로 유배를 보냈으며, 3남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았습니다. 영웅의 후손인 강 빈은 반대로 혹독한 치욕과 결국 시아버지로부터 사사를 당해 죽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민회빈강씨는 병자호란과 볼모로 청에 끌려가는 수모 속에서 그저 주저앉아 있지만은 않았습니다. 심양에서 그녀는 직접 농지를 개간하고, 포로로 끌려가 노예시장에 팔릴 위기에 처한 조선인 포로들을 구제한 여걸이었습니다. 그녀는 농지를 개간하고 적극적인 상업활동을 통해서 소현세자의 청과 외교에 있어 여러 도움을 주었습니다. 강씨는 수동적으로 상황에 끌려다니기보다 적극적으로 운명을 개척하며 조선의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조선은 당시 그런 강씨의 모습을 품을 만큼 사회가 열려있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인조 자신이 청의 굴욕을 당했기 때문에 청의 볼모로 잡힌 세자를 차기 왕위 계승자로 인정하지 않고 의문의 독살을 당한 소현세자의 아내와 볼모로 잡혔을 때의 행적이 괘씸죄로 걸려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민회빈 강씨는 한편 여성에게 있어 전쟁의 비정함을 바로 보여줍니다. 병자호란 때 청에 끌려간 여인들은 현재의 홍제천에서 몸을 씻으면 정절을 잃은 것을 면해 준다고 했으나 일설에는 이때 포로에서 귀환한 여성들은 환향녀라는 욕을 들으며 비참한 여생을 보내야 했다고 합니다. 조선은 고려와 달리 판세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명과의 사대에 얽매여 전쟁포로로 백성들이 끌려가는 고통을 안겼음에도 적극적으로 책임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강씨의 아픈 설화는 현재 광명시에 있는 영회원의 묘지와 함께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고려의 위기를 극복하고 한민족의 위엄을 세운 영웅, 강감찬과 그의 후손으로 비운의 시대에서도 스스로 삶을 개척했으나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던 민회빈강씨의 이야기는 금천지역에서 오랫동안 터전을 일구고 살아간 강씨 집안의 가장 유명한 이야기로 지금까지 회자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