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은 어디서 시작됐을까
현대적 디자인의 원류는 장식미술에서 시작해 르네상스로 오면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과학 접근법적 창작활동이 과학기술의 발전과 산업혁명으로 이어지면서 근대산업의 생산성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 것에서 찾습니다. 그러나 당대 일부 사람들에게 갑작스레 증폭된 생산성은 물질적 풍요로움보다는 산업메커니즘과 이를 주도하는 인간에의 실망감을 느끼게 했으며, 이는 다시 미켈란젤로의 예술을 향한 순수한 장인적 창작활동을 원하는 영국의 ‘윌리엄 모리스’ 등 예술가집단의 ‘미술공예운동’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움직임은 1919년 바우하우스의 장인적 전통으로 이어져 현대 디자인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후, 디자인은 국가별 사회공동체적 기질과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팝아트, 그래픽디자인에 영향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예술의 경향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전까지 유럽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예술가들은 뉴욕으로 옮겨가 잭슨 폴락, 마크 로스코 등의 추상표현주의를 탄생시켰고, 1960년대로 넘어오면서 경제적 호황기를 맞이한 미국의 산업군은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해 대중들의 소비 촉진 풍조, 광고‧미디어 등 대중문화가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간 추상표현주의가 간과했던 미국인들의 풍속에 관심을 보이고, 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산업제품 등의 소재들로 창작활동을 하는 예술가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들을 ‘팝아티스트’ 라고 불렸습니다. 리히텐슈타인, 앤디워홀이 대표적이며, 이들은 일상에서 찾은 소재를 예술작품에 차용한 것에서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의 경계를 허물고, ‘예술은 고급취향’이라는 인식을 누구나 쉽게 향유할 수 있는 예술로 인식하게 하는 전환점 역할을 했다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이들이 주도한 예술사조는 전 세계 다방면으로 확산되어 영향을 끼쳤으며, 그 중 그래픽디자인 발달에 영향을 끼친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해방 후, 미술단체 결성 증가
국내의 디자인 역사를 톺아보면, 국내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을 기점으로 근현대미술의 시작점을 잡을 수 있었던 것처럼 디자인의 시작점을 삼을만한 명확한 이슈에 대한 논의가 학자, 전문가들 사이에서 견해가 갈리는 가운데, 당시 정부의 경제개발 정책으로 산업시설 확충이 시작된 1945년부터를 디자인이 발아됐던 시점으로 보는 데는 이견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때 활동했던 작가들은 해방이후 미술이 단순 미학‧창작의 개념을 넘어 사회적 역할을 도모하길 바라며 단체활동을 활발히 전개해 나갔습니다. ‘조선미술가협회’ 1945년 11월 결성, ‘조선산업미술가협회’ 1945년 12월 결성, ‘독립미술협회’ 1946년 1월 결성, 조선상업미술가협회’와 ‘조선공예가협회’ 1946년 3월 결성 정도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전 ‘한글 타이포그래피’ 글에서 언급한 인쇄·출판업계 증가뿐만 아니라, 1955년에 생산된 ‘시발자동차’와 1957년 금성사가 설립된 것을 확인하면서 다양한 산업군의 태동이 시작되었고, 대학에서 디자인 전공학과 개설 등 산업이 가속화됨에 따른, 국가차원에서의 디자이너 양성 사업이 대두되는 흐름 속에 예술가들과 디자이너들은 창작활동을 해 나갔습니다.
최초의 디자인단체 『조선산업미술가협회』 그리고 그래픽디자이너 한홍택
앞서 결성된 미술단체 중 ‘조선산업미술가협회’를 주목 할 만합니다. 한홍택, 조병덕, 김관현 등 창립멤버가 ‘조국광복과 산업부흥전’이라는 주제 아래 36점의 관광, 화장품, 산업건설, 등산, 박람회, 상품, 영화 등 포스터 위주 창립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존속되고 있다는 역사적 의의가 있습니다. 이 협회는 ‘대한산업미술가협회’로 개칭 후, 각종 기념전, 국제 교류전을 여러 차례 개최, 우리나라 최초의 디자인 공모전인 ‘전국그라픽공모전’ 개최하였고, 1960년대에 들어서는 ‘공예부’를 신설하여 디자인 범위를 넓혀 활동을 해나갔습니다. 이 단체가 지금껏 존속해 올 수 있었던 이유는 창립멤버 ‘한홍택’의 활약의 영향이 있었습니다.
한홍택은 1940년부터 유한양행 아트디렉터로 일한 바 있으며, 그래픽디자이너와 화가활동을 병행했던 예술가로서, “디자인은 예술이다”라는 신념으로, 당시 ‘도안사’로 취급받던 디자이너의 지위를 격상시키는 것, 디자인을 저변화시키는 것에 책임감을 느끼며 활동해왔습니다. 지금도 ‘디자인은 예술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며, 순수예술이냐 아니냐의 논란이 지속되고 있지만, 당시 ‘디자인’과 ‘디자이너’에 대한 제대로된 개념이 자리잡히기도 전이었고, 그저 ‘도안사’로만 치부해버리는 사회적 인식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일환으로 ‘회화’작업을 해왔던 것이라고 ‘한홍택’디자이너는 말했습니다.
그는 예술과 디자인의 관게에 대해서 ‘생활하는 미술인, 산업하는 미술인, 나아가서는 외교하는 미술인’이라고 말한바 있습니다. 그러면서 회화나 조각 등 순수미술과는 달리 국민 생활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갖고 국가사회 발전을 위한 산업의 동맹 역할을 하는 독자적인 전문영역임을 강조했습니다.
한홍택은 한국의 농촌, 한복을 입은 여인 등 전통의상을 입은 인물, 사물놀이, 석굴암 등 문화유산, 설악산 등 한국적 소재를 관광포스터를 주로 제작해, 한국적 정서와 아름다움을 담아내면서 한국적 정체성을 지속적으로 표출해왔습니다.
그는 1970년에 은퇴하여, 1980년대 후반까지 회화활동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여, ‘대한산업미술가협회’와 ‘한국미술가협회’ 고문활동을 지냈고, 1993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수상’, 1994년 78세의 나이로 타계하게 되었습니다.
포스터는 미술과 산업 결합체, 한국그래픽디자인협회 결성
1960년대 경제성장이 가속화되면서 ‘미술수출’이라는 구호 아래 디자인의 중요성이 강조되었습니다. 당시 포스터는 미술과 산업을 결합하는 동시에 디자인이라고 하는 새 영역을 표현하는데 적합한 매체로 여겨졌습니다. 1966년 ‘상공미전’ 결성. 1970년대 관광산업 진흥정책에 따라 ‘한국적 디자인’ 포스터가 다량생산되었습니다. 1970년대 중반에 들어와서는 청년 디자이너들의 활발한 활동으로, 그래픽디자인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됩니다. 1972년 ‘한국그래픽디자인협회(KSGD)’ 결성하면서 1973년 한국 관광포스터전을 개최, ‘상공미전’에도 한국관광포스터가 대량 출품, 각종 상을 수상했습니다. 1974년 CDR(조영제디자인연구실) 결성되었습니다. 1976년 김교만 ‘한국을 주제로 한 관광포스터展’ 개최하였습니다.
문화소비 활성화, 디자인전문회사 성장
1984년 ‘한국그래픽디자이너협회(KOGDA) 결성되었으며, 1985년 우수디자인(GD) 정책이 시작되여, 기업 상품 디자인 품질 보증 제도로, 정부 디자인정책이 실효성 있게 수행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힙니다. 1987년 해외 디자인 표절에 대한 경각심으로 ’국제저작권협약‘을 맺었으며,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로 경제규모, 사회문화, 생활 전반에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조영제‘는 88올림픽 공식포스터를 만들었습니다. 1990년대 거의 모든 기업에 디자인경영 열풍이 불어, 디자인연구소가 설립되었으며, 디자인 전공자가 대거 임원급으로 발탁되었습니다.1990년 WTO 체제와 시장 개방 등으로 국내에 해외 유명 상품이 넘쳐났으며, 1993년 한국산업디자이너협회(KAID) 결성되었습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시민들의 복지향상과 공공서비스 개선사업의 일환으로 디자인이 주목받기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1995년 지방자치제가 도입되면서, 각 지자체는 지역의 발전을 위해 디자인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디자인 산업의 다양화, 예술적 응용 및 활용 증가
2000년대 들어서면, 디지털시대를 맞이하여 산업 및 기술의 융복합이 두드러지며, 아트마케팅, 브랜드마케팅의 일환으로 그래픽디자인의 질적 성장과 기업별, 디자이너별 다양성이 두드러지며, 각자의 개성을 중시하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2005년 디자인보호법 시행, 2009년 서울디자인재단 설립, 2012년 과자전 창립전
예술로서 디자인, 아트아카이브로 높아진 그래픽디자인 위상
디자인과 예술 관계에 대한 톺아보기는 제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시작됩니다. 몇 년 전, 디자이너들이 1945년부터 생산한 리플릿, 팸플릿, 초대권 등의 1차 자료들로 미술단체 100년을 톺아보는 자료집 제작 프로젝트를 진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단체의 범위를 정하는 일이 초반기획 작업의 핵심이었기에, 전수조사를 하면서 범위에 대한 고민을 다각도로 근 2주가까이 해었고, 1945년부터 1999년까지 창립된 회화 조각 판화 미디어 그룹의 창작미술단체를 다루되, 공예 디자인 서예 사진 건축는 제외시켰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후,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부르디외’의 관점으로 예술을 분석했던 경험은 고급문화와 저급문화,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처럼 ‘구별짓기’식 관점으로 분야에 게층을 두는 것이 당연해졌습니다. 그러다 디자인분야를 접하게 되면서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부터 ‘예술과 디자인의 관계를 어찌 설정하지?’라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이와 같은 예술과 디자인의 관계 대한 고민은 오래전부터 전문가들이 해오던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철학자 발렘플루서는 ‘디자인이라는 단어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디자인은 어느 정도 예술과 기술이 (각자 가치 평가적 사고방식과 과학적 사고방식을 존중하면서) 새로운 문화형태를 가능하게 만들면서, 동등하게 함께할 수 있는 장소를 보여준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술연구·기획 전문가 큐레이터의 디자이너의 예술적 행위를 다각도로 조망한 전시를 통해서도 알 수 있었습니다. 현대카드 ‘일상을 예술로 바꾸는 디자인展’, 국립협대미술관 ’사물학-디자인과 예술展‘ 등이 있습니다.
한편, 국립현대미술관은 돌아오는 11월부터 한홍택 디자이너를 조망하는 전시를 합니다. 이는 국립단위 미술관에서 그래픽디자이너 1세대로서 재조명받고있다는 증거이자, 그래픽디자인 산물인 아트아카이브의 높아진 위상을 실감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아트아카이브는 근현대 미술사와 디자인사의 정보를 담고있는 1차적 기록물로서 연구·보존의 가치가 크며, 정보오류를 바로잡을 수 있는 역할 수행, 문화사업으로까지 활용이 가능합니다.
지금 생산되는 그래픽디자인들도 어쩌면 먼훗날 2022년을 대표하는 산물로, 누군가의 연구주제, 누군가의 문화기획 대상, 누군가에게 잘못된 정보를 알려주는 자료가 될지도 모릅니다. 이에 그래픽디자이너들은 자긍심을 갖고 일할 자격이 너무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